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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dy Edge Wave
감각의 리셋








 Trần Minha (미술비평) 
 < 덩어리 모서리 소리 > 전시비평 (스텔라 갤러리, 2024)


















대곡리 대나무숲을 지나 안개 자욱한 대곡천변 길을 20여 분 정도 걷다 보면, 바위에 새겨진 한반도 최초의 그림인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만날 수 있다. 고래, 멧돼지, 사슴, 호랑이, 사냥꾼, 사냥 도구 등을 묘사한 수렵 채취 시대의 풍경은 10m 폭 바위에 담겨 눈 앞에 펼쳐진다. 알타이 암각화에 속하는 반구대 암각화와 유사한 기호들은 서쪽으로는 바이칼 호수에서부터, 북으론 시베리아, 동쪽으로 북, 중 아메리카까지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암각화를 보고 있으면 7000년 전 이곳, 누군가의 삶이 문명의 긴 시간과 넓은 공간을 뛰어넘어 나에게 직접 전달되는 숭고함을 느낄 수 있다.
  이다 작가의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시원함이 느껴진다. 그‘시원함’이란 예술을 보는 태도,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 문명에 얽힌 찌꺼기들의 초기화(reset)를 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번 전시 < 덩어리모서리 소리 >는 이전 시리즈의 변이인 ‘Proto-Painting’ 시리즈와 새로운 ‘Proto-Drawing으로 구성되어 있다. ’Proto-‘ 시리즈는 왁스의 빛을 머금는 성질과 빛을 반사시키는 유화의 물성을 대비시켜, 작가가 그린 알 수 없는 기호들의 촉각적 효과를 자아낸다. 흐물흐물한 라인들의 윤곽은 스텐실 기법으로 깔끔하게 처리된 만큼, 매우 명확히 계산된 보색들로 화면을 구성해 자유롭지만 엄격한 독자적 시각 체계를 만든다. 왁스 캔버스 배경을 뚫고 나오는 라인과 색의 정교함, 화려함은 신체의 누락된 촉각성을 회복시키며 명징하게 드러난다. 얼핏 즉흥적 원시 그림처럼 보이지만 명쾌한 라인의 형태와 색 그리고 구도의 균형감은 완벽히 연출된 작가의 중재된(mediated) 감각의 결과다. 수학적 질서를 바탕으로 자유로움을 펼치는 바로크 음악처럼 이다 작가는 색과 라인, 질감의 평면적 질서를 기반으로 변주를 펼친다.
 
  자신의 작업이“붓질의 아우라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이다 작가는 동시대 회화가 가진 매체의 근본적 문제를 대면한다. 동시대 예술가에게 숙련된 기법은 작가의 단독적 감정과 감각을 진부한 틀에 가둘 수 있지만, 기존 기법을 포기한다 해도 독창성이 보장되지 않는 진퇴양난을 겪는다. 현재 예술가의 보편적 고민은 선사시대 이후 발생한 동서양 문명이 이룬 예술의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2024년 지금 누군가가 ‘순수한 그림’을 그린다고 주장한다면 순진해 보일 수 있다.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에서는 현존 최고(最古) 동굴 벽화를 볼 수 있다. 약 51200년 전 그려진 멧돼지와 사람들은 단호하며 섬세한 라인들로 표현된다. 붓 비슷한 도구로 그려진 라인들을 보며 획의 움직임, 속도, 가속도, 머뭇거림을 상상할 수 있다. 바위를 쪼아 새긴 반구대 암각화의 기호화된 이미지들과 달리, 술라웨시의 동굴 벽화들에선 그림을 그린 선조의 섬세하고 여린 감각의 표현을 느낄 수 있다. 깔끔한 ‘Proto-Painting‘ 시리즈와 대비되는 ’Proto-Drawing‘은 알루미늄판으로 만든 도구를 사용해, 종이 위에 투명 미디엄을 섞은 유화 물감을 눌러 바르는 행위로 완성했다. 동작과 끊음을 반복하며 굵은 라인들을 만들고, 거친 라인들이 종이 프레임 안에서 미완의 형태를 만든다. ’Proto-Drawing‘은 해독할 수 없는 선사시대 그림 같아 보이지만, 감각이 표현되는 방식에서 동시대적 느낌을 자아낸다. 이다 작가의 비선형적 감각은 흐름의 끊김을 통해 감각을 밀어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함축, 방출, 멈춤의 반복은 작가가 스스로의 직관을 의심하고 차단하는 장치이자 기법으로 쓰인다. 작가는 기법 사이로 삐져나오는 의도치 않은 순간들이 의도를 가진다는 역설을 산뜻한 움직임으로 표현한다. 이다 작가의 속도, 가속도, 멈춤으로 만드는 선과 색의 균형은 감각의 새로운 질서를 구현한다.
 
  인간은 소리의 진동을 신체적으로 느끼기 때문에 청각은 시각보다 훨씬 더 직접적인 감각이다. 오늘 우리는 51200년 전 동굴벽화나 7000년 전 암각화를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지만, 그때의 소리나 음악은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다. 여기서 발생하는 시각과 청각의 역설적 격차는 어떤 철학적 문제를 품고 있을까? 술라웨시 동굴벽화를 보면 그 이미지들은 실용적 기호가 아닌 삶의 감각과 감정의 표현이라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그만큼 그리고 보는 행위-즉 예술이 우리 선조의 삶에 중요한 일부거나, 또는 인간이 감각과 의식을 가지게 만드는, 동물과 구분되는 핵심일 수도 있다. 결국 우리의 시각, 청각, 촉각을 포함한 모든 감각과 의식은 시간을 벗어나 작동할 순 없다. 인간에게 시각은 공간을 정리해 주고, 음악은 시간을 정리해 준다. 작가가 제시하는 감각의 초기화(reset)는 아마도 ‘보여지는 것’에 편향된 동시대 문화에 대한 문제의식의 감각적 표현일 것이다.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제시할 수밖에 없다는 동시대 예술에 대해 은은하지만 명쾌한 선율로 다가오는 이다 작가의 작품들은 무뎌진 감각의 격차를 극복하는 구체적 행위이자 작가 의식의 흔적이다.■

끝없이 보충되는 
불완전한 기호







 



이선영 (미술비평) 
 < 덩어리 모서리 소리 > 전시비평 (스텔라 갤러리, 2024)


























































































Endlessly Supplemented, Imperfect Signs





Lee Sun young (Art critic)
< Body Edge Wave > preface  (Stella Gallery, 2024)




































































































































  이다 작가의 개인전 〈덩어리모서리 소리〉에 발표된 ‘PROTO-Painting’ 연작은 팝업 같은 경쾌한 형태와 선명한 색감을 가졌지만, 회화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진지한 탐구를 깔고있다. 작가는 기계적 스펙터클의 범람이라는 현대적 환경 속에서 점점 그 입지가 좁아지며 스스로 고갈되고 있는 현대회화의 지속 가능한 방식을 탐색한다. 그 하나의 방법으로 회화의 시작이지만 그 자체는 회화가 아닌 기호들에 주목한다. 가령 유적으로 남아있는 동굴벽화나 갑골문자 등이 그것이다. ‘PROTO-’라는 키워드처럼, 작가는 추상도 구상도 아닌 더 원초적 단계로서의 원시적 기호와 회화의 교차점에서 추상성을 찾는다. 추상화가 지시 대상을 괄호 치듯이, 작가 또한 미지의 언어 환경에 한동안 놓이면서 내용을 초월한 기호에 유희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유럽에 교환교수로 다녀온 이후 발표된  ‘Linear A-’로 제목이 붙여진 시리즈는 비교대상이 없어 언어화되지 못한 유럽 고대 문자들에서 영감을 받았다. 
  발굴 단계에 있는 이 유적지의 문자들은 글자로 추정되나 읽을 수 없는 상태다. 문자는 선으로 형태화되고 완성된 문장 또한 선적인 논리에 따르기에, 이전의 구술문화의 한계를 극복함과 동시에 단선적 논리라는 또 다른 한계를 가진다. ‘덩어리모서리 소리’는 다양한 차원에서 기호적 현상에 접근한다. 일상어에서 덩어리는 실재적이지만 현실화되지 못한 것을 말한다. 석탄 덩어리가 에너지원이 되려면 모종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모서리는 한 번 이상의 가공을 거친 것이다. 레비 스트로스의 비유에 의하면 날것이 아닌 익힌 것이고, 자연이 아닌 문화에 속한다. 그러나 자연이나 문화로 충분한가. 이다가 전시 제목으로 압축한 세 개의 단어는 이항 대립을 극복하는 제3의 요소를 끌어들인다. 작품이라는 결과로 볼 때, 소리는 뿌리도 줄기도 아닌 꽃에 해당한다. 3항은 라캉의 실재계/상상계/상징계처럼, 실체라기보다는 관계적이다.
  덩어리가 원석 같은 것이라면 모서리는 보석으로 가공한 단계일 것이고, 소리는 사회의 상징적 질서에서 가치를 부여받는 것과 비교될 수 있다. 사회의 물신적 체계에 들어서야 원석이든 보석이든 의미가 부여되고 소통/유통될 수 있다. 경매사가 어떤 물건을 흥행시킬 때, 소비자의 탄성이 곧 가치의 정점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일 것이다. 다시 이다의 작품으로 돌아오면, 최근 전시에서 자주 사용하는 밀랍, 무엇보다 화가의 주재료인 유성 물감 등이 모두 덩어리들이다. 그것들이 작가의 손을 거쳐 안착하는 사각 캔버스나 종이 같이 정제된 표면은 모서리에 해당한다. 이번 전시에서 한 공간을 차지하는 드로잉 작품군은 작가가 만든 딱딱한 기구로 물감을 종이에 얇게 펼쳐 기호적 형상을 만드는 방식으로, 덩어리의 극적인 변신을 보여준다. 이다의 작품은 ‘물감이 발린 평평한 표면’으로 축약되는, 추상화로 이어진 근대미술의 정의에 머무르지 않는다. 말 그대로 덩어리와 모서리는 소리로 승화되고자 한다.
  소리는 언어나 음악같이 문법에 의해 작동하지 않는다. 미술의 주 감각인 시각은 가장 고차원적인 감각답게 관념에 얽혀있다. 자명하게 받아들여지는 상식이든 공고한 이데올로기이든 초월적인 형이상학이든 말이다. 이다는 그러한 관념적 시각성을 벗어나고자 그동안 여러 재료를 연구해 왔다. 시각의 자리를 대신하는 소리에는 촉각적인 면이 있다. 좋은 소리는 시원한 바람처럼 불어오며, 감도가 높은 음향기기는 감상자를 완전히 감싸는 듯한 사운드를 송출한다. 작가가 영감을 얻은 기호의 세계는 보다 원초적 성격을 띠는데, 그것은 시각적인 촉각성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점자 같은 것으로 축소될 것이다. 밀랍 층이 가세함으로써 생기는 미묘한 공간감은 모더니즘의 이상적인 시각처럼 한눈에 그 전모가 파악되지 않는다. 정사각형 화면 안에 획과 획이 겹치고, 획의 그림자도 밑바탕에서 비치는 작품들은 이번 전시에서도 연속된다. 
  
  읽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힘 있는 단호한 형태들이 펼쳐진다. 롤랑 바르트가 주장했듯이, 대개 소비로 귀결될 읽기보다는 쓰기를 독려한다. 문자의 속성인, 이런저런 각도의 가지는 분절화된 선은 추상적 필획과 연결되었다. 유적은 흔적일 뿐 온전한 형태가 아니어서 해석학적 상상력이 요구된다. 누군가를 향해 발신된 메시지는 본래 빈칸을 담고 있다. 시간의 시험을 견뎌낸 잔여물은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가 말한 ‘열린 예술작품’이 된다. 불완전한 기호가 야기하는 끊임없는 해석학적 상상은 고고학, 역사, 과학과 함께 예술도 공유하는 과정이다. 회화는 보이는 상태 이외의 어떤 것도 지시하지 않는다는 미학적 규범, 즉 예술의 자율성을 회화가 확보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하지만 자율성 이전에 더 기나긴 소통의 역사가 있었다. 이다의 작품은 미술의 역사보다는 기호학적인 접근을 요구한다. 안느 에노는 《기호학사》에서 관념은 언어를 통해 형태가 갖추어지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쉬르의 주장을 인용한다.
  소쉬르의 학설에 의하면 모든 언어의 공통된 자질은 차이와 체계성이다. 그것은 모든 의미체계에 내재한 규약으로 간주된다. 기호학적 맥락에서 이다의 불완전해 보이는 기호들은 투명한 소통과는 거리가 있지만, 필획 같은 형태로 강조된 분절적인 선은 ‘차이들로 이루어진 체계’(소쉬르)를 나타낸다. 물론 원초적 단계이기에 체계적이지는 않다. 차이의 감각을 고양시키는 중층적 화면은 명백한 의미(의식)가 아닌 것들을 암시한다. 이다가 사용하는 독특한 재료인  밀랍은 자크 데리다가 《글쓰기와 차이》에서 인용한 프로이트의 ‘매직 메모’를 연상시킨다. 매직 메모는 무엇인가를 쓰고 그것을 들어 올리면 이전의 글자가 지워져서 다시 쓰기를 반복할 수 있는 판 형태의 장난감이다. 그러나 글의 지속적인 흔적이 밀랍 판 위에 유지되어 적정 조명 속에서는 읽힌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밀랍 판은 사실상 무의식을 나타낸다.  교대로 글이 지워졌다가 보이게 되었다가 하는 것은, 기억 속에서 의식의 나타남과 스러짐에 비견된다. 이전의 흔적을 남겨둔 듯한 이다의 화면도 새로운 기재 공간을 생성한다. 기호 이전에는 기호도 사물도 이미지도 아닌 원초적 형태가 공존했을 것이다. 작가는 그 ‘사이들’에 주목했다. 경계에 있는 것들은 ‘이것도 저것도 아님’과 동시에 ‘이것도 저것도’이다. 이미지가 반쯤 섞인 상형문자는 중요한 매개고리가 된다. 소통의 역사에서 종이의 발명도 현대의 컴퓨터 못지않은 혁명적 사건이었다고 볼 때, 더 오랜 시간 동안 기호는 바위나 나무껍질 점토 등 사물 위에 새겨졌다. 이다가 화면에 반투명한 밀랍을 도톰하게 도포하여 그 전후에 이미지/기호를 그리는 것은 ‘PROTO-’ 단계에 근접하려는 선택이다. 일반적인 회화의 관례에서 왁스는 그려진 것이나 색칠된 것을 모호하게 하는 ‘이물질’에 해당하지만, 이다의 작품에서 독특한 효과를 자아낸다.
  2021년 개인전 제목 〈일렁〉처럼 중층적인 이미지, 따스함, 촉감 등이 그것이다. 손상된 피부에 바르는 바셀린처럼 이 반투명 물질은 조각난 기호의 원상회복을 도와줄 듯하다. 그런 재료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요셉 보이스가 치유와 회복이라는 의미로 평생 사용했던 지방 덩어리일 것이다. 어디선가 떨어져 나왔을 조각들은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 서로의 접촉을 활성화한다. 다른 색으로 칠해진 필획들은 얽히고설킨 복잡한 양상을 더욱 강조한다. 이다의 회화와 드로잉에서 형상들은 육감적이다. 그림은 만지면 안된다는 금기를 위반하는 촉각적 표면이다. 이것은 유화 물감의 스퀴지 터치와 함께 시각적 촉각성을 자극한다. 이 부분은 스펙터클의 범람에서 회화가 자기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이다는 그럴듯한 회화적 아우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원초적인 감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에서 촉각성을 만났다. 앞으로 입체의 차원으로 밀랍의 물성을 확장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슬쩍 만져보면 꿉꿉한 것이 물질이 아닌 유기물의 느낌이다. 통상적으로 그림은 완벽하게 밑 작업이 된 천 바탕이나 매끄러운 종이에 미끄러지듯 그려지지만, 이전부터 붓의 사용을 자제해 왔던 이다의 회화는 그리기와 만들기의 중간쯤에 속한다. 여러 재료와 기법을 통해 만들어진 중층적 화면은 미술의 여러 분야를 동시에 전공한 작가의 이력도 떠올린다. 이번 전시에서 작은 방 하나를 채울 ‘PROTO-Drawing’ 연작 또한 작가가 고안한 ‘알루미늄 붓’으로 그려졌다. 마치 혁필화 같은, 금속판의 탄성을 이용한 드로잉은 붓 못지않은 자유로운 유희의 장이다. 부드럽지 않은 금속판을 사용한 드로잉은 지시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 기호적 추상 회화에 필수인 분절화된 형상이 특징이다. ‘PROTO_Painting’ 연작처럼 다채로운 색감과 분절화, 흐름의 결합이다. 동질이상의 시리즈를 통해 작품들 사이의 잠재적 운동을 만들며, 작가는 회화의 전통적인 매체를 벗어나면서 전형적인 시각성 또한 벗어나려 한다. 
  
  촉각은 청각과 함께 시각보다 하위 감각으로 간주되어 왔다. 원초의 단계로 역행하는 과정은 고등 감각으로 간주한 시각성을 반성하게 한다. 자크 데리다는 《글쓰기와 차이》에서 레비나스를 인용하면서 시선은 그 자체로는 타자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소리를 빛 위에 위치시키는 레비나스는 “사유는 언어인데 그것은 빛과 유사한 경로가 아니라 소리에 유사한 경로로 사유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청각은 색깔이나 형태 등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소리와 신체적인 것의 진동과 관계되어 있다. 자크 데리다는 말과 글은 진정 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다시금 몸짓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몸짓에서 논리적이고 논술적인 의도는 축소되거나 종속된다. 데리다는 언어와 논리의 분절이 아직 완전히 냉각시키지 못한 절규를, 즉 모든 말 속에 잔존하는 억눌린 몸짓이 거부되기를 바란다. 데리다가 예를 든 이상적인 예술가는 의성어에 가치를 부여한 아토냉 아르토이다. 
  이 극작가는 모방적 언어도 명사의 창조도 아닌, 단어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순간의 초입으로 관객을 안내한다. 그것은 대본의 재현이 아니라 언어들의 기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르토는 이렇게 몸짓과 말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를 통해 옛날의 주술적 효과를 되찾고자 했다. 언어 기호 이전에 소리가 있지 않았겠는가.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언어는 (대개 어머니로 대표되는) 타자로부터 소리로 듣고 배우게 된다. 그것은 이후의 외국어나 과학적 부호 등의 습득 과정과 달리 무의식적이다. 작가는 이 원초적 단계를 ‘추상 본능’이라고 말한다. 미술사에서 추상을 개념의 진화로만 보는 것은 일면의 진실이다. 중층적 표면으로 이루어진 이다의 작품에서 아래층에 깔린 것들은 언제든 위로 올라올 수 있으며, 그 반대 방향도 마찬가지다.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여러 통로를 마련해주는 것, 그것이 ‘덩어리’, ‘모서리’, ‘소리’라는 다양한 키워드를 병렬하게 했다. 
  ‘소리’라는 키워드로 작가가 담으려고 했던 움직임은 작품 하나에서 작품들 간, 시리즈별로 내재되어 있다. 음의 파동을 떠오르게 하는 ‘PROTO-Drawing’ 연작이 선율이라면, 다양한 음색의 공시적 조화가 있는 ‘PROTO-Painting’ 연작은 화음이다. 소리로 대변되는 움직임은 생명의 느낌이다. 살아있는 것은 행동한다. ‘기운생동’이라는 말처럼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형상이나 문자를 쓰는 것은 동양 미학의 오래된 희망 사항이기도 했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은 문자추상, 서체 추상의 흐름도 있지만, 이다의 경우 풍부한 색감이 가세한다. 작품의 생산 주체로 비유하자면, 관념적 서사에 능한 선비가 아니라, 활동적인 현대 여성이다. 밀랍으로 도포된 표면은 빛까지 발산하여 파스텔 톤의 다채로운 색과 반응한다. 보편적인 장식의 전통도 굳이 피해 갈 이유가 없다. 

  연필이나 붓 같은 ‘고등한’ 기구 이전, 필기구라는 기능과 무관한 사물로부터 생겨난 스트로크는 ‘PROTO-Drawing’이 되었다. 고대의 관례처럼 물질 위에 각인된 듯한 형태다. 이다에 의하면 붓은 사람을 예민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붓은 획의 전형이 아니며, 자신은 붓을 떠난 스트로크가 좋다고 말한다. 붓에 회의적인 작가는 ‘붓 아닌 것’으로 필획을 실험한다. 붓을 상대화하려는 이다는 컴퓨터 프로세스도 적극적으로 도입한다. 십수 년 전에 박영 레지던시에서 작가를 처음 봤을 당시에도 화폭과 붓 대신에 시트지나 에어브러시로 작업하고 있었다. 컴퓨터의 활용은 물론이고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화면에 물감이 마르는 시간까지 더하며, 이다의 작품은 면밀한 계획하에 제작된다. 하지만 정작 완성된 형태는 불완전한 기호다. 불완전성은 지속적인 보충을 요구한다. 메시지는 발신자가 보낸 완벽한 기호로서 읽히기보다는, 수신자의 공조가 필수다. 
  밀랍 표면 처리 전후에 이미지가 자리한 화면은 그림자를 포함한 여러 층이 공존하는 듯이 보인다. 유화로 단호하게 칠해진 형태는 이미지가 아니라 기호이며, 정확히 무엇인가 지칭하는 기호가 아니라 기호 이전의 단계, 또는 이후의 단계이다. 이다의 화면 밑층을 형성하는 밀랍은 실은 고대 로마 시대에도 사용되었던 오래된 미술 재료이다. 빛바랜 종이 같은 우윳빛 색감의 오래된 미디엄은 작가만의 처리 과정을 통해 보다 단단한 구조로 변하지만, 그 재료가 가지는 본질은 유지된다. 반투명 재료는 계속 겹쳐 그려진 고대의 동굴벽화나 암각화의 공간감을 연상시킨다. 종이의 발명 이전의 양피지에 쓰인 문자처럼, 알레고리와도 같은 중층적 과정은 그려진 것들을 불투명하게 한다. 이상적인 기호는 메시지를 완전하게 전달하는 투명성이 특징이지만, 원초적 기호는 투명하지 않다. 이에 더해 이다의 기호는 실제처럼 그림자마저 가지고 있다.
  
  각 분야에서 발전의 지표는 물질의 저항을 극복하는 것이라 할 때, 미술은 여전히 투쟁 중이다. 회화가 몸과의 유대를 지속하는 것은 몸 또한 완전히 코드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전에 실제였던 것들을 코드화시키는 정보기술의 시대에, 몸은 여전히 완전하게 코드화될 수 없는 회화의 조건이다. 작가는 기호의 원천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기호를 초월하는 회화의 본질을 암시한다. 해체주의가 말하듯 ‘말소하에 놓인’ 기호적 형상은 기호를 본질이나 대상이 아닌 끊임없는 차이의 계열로 의미화한다. 불완전한 차이의 체계인 기호는 이중적으로 시간을 요구한다. 에른스트 카시러는 《인문학의 구조 내에서 상징 형식 개념》에서 의식은 시간 형식에서 해방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의식의 특징적인 본질은 시간 형식에 들어있고 시간 형식에 바탕을 둔다. 시간의 축을 따르는 기호는 고정되지 않고 표류한다. 
  고정되지 않는 기호들은 신비하다.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해석의 한계》에서 “신비주의적 표류”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시니피에에서 시니피에로, 유사성에서 유사성으로, 연결고리에서 또 다른 연결고리로 미끄러지는 과정을 말한다, 물론 고대와 현대의 차이는 있다. 고대의 기호현상은 현대처럼 보편적이고 일의적이며 초월적인 시니피에의 부재를 주장하지 않는다. 에코에 의하면 고대의 기호현상은 강력한 초월적 존재, 즉 신플라톤적 절대 존재가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모든 것을 가리킬 수 있다. 《해석의 한계》에 의하면 전체와 무, 그리고 모든 것의 표현할 수 없는 근원인 신플라톤적 절대 존재는 상호지시적이고 미로식의 거미줄과도 같은 조직망을 통해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연결될 수 있도록 작용한다. 고대의 기호현상은 이 세상의 위대한 텍스트가 그렇듯이, 모든 텍스트에서 시니피에의 부재가 아닌 시니피에의 완전함을 확인한다. 궁극적인 시니피에는 접근 불가능한 비밀일 수밖에 없다. 
  반면 현대의 기호현상은 “현실은 절대적 개체가 존재하지 않는 연속체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무한한 해석이 가능”(퍼스)하다. 퍼스에 의하면 기호들과 사물들의 이 같은 미로식 여행은 여행 자체의 즐거움을 제외하면 어떠한 목적도 갖지 않는다. 원시적 기호에 대한 탐구를 통해 현대회화에 접근하는 이다의 작품은 미지의 언어를 대할 때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의미를 모르는 낯선 언어를 만날 때 형태와 소리가 먼저다. 읽을 수 없는 형태는 이미지를 닮았으며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는 소리로 증폭된다. 그것은 의미와 대상을 괄호치고 형식에 집중하게 하는 심미적 전략이다. 반복되는 끝자로 인해 율동적으로 읽히는 제목 〈덩어리모서리 소리〉는 분절화되지 않거나 주변화된 나머지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작품 형상들이 아름다운 잔여물 같은 느낌을 주는 것과 유사하다. 명백히 코드화되지 않는, 분류되지 않는 나머지 것들은 타자화되곤 한다. 하지만 현대철학은 동일성의 몸통이 바로 타자라고 말한다■

  


  Rheeda's solo exhibition, titled Body, Edge, Wave, presents the PROTO-Painting series, which features vibrant forms and vivid colors like a pop-up, yet is deeply rooted in a serious exploration of painting's origins. Amid the overwhelming spectacle of modernity, where the status of painting is increasingly marginalized and depleted, the artist searches for a sustainable method of modern painting. Rheeda focuses on signs that represent the beginnings of painting but are not painting themselves—such as cave paintings or oracle bone inscriptions. Abstract art, positioned at the intersection of primitive signs and painting, marks this point of exploration. As the keyword "PROTO-" suggests, these works exist at a stage before abstraction or figuration. Just as abstraction suspends its referential object, Rheeda approaches signs playfully, transcending content while immersing herself in an unfamiliar linguistic environment. The series titled "Linear A-," released after her time as a visiting professor in Europe, was inspired by ancient European scripts that, without comparisons, have remained untranslatable.
  Artifacts unearthed from ruins often contain letters that remain unreadable. Letters are shaped by lines, and even complete sentences follow a linear logic that overcomes the limitations of oral culture while inheriting the constraints of linear reasoning. Body, Edge, Wave approaches signs from various dimensions. In everyday language, a "body" refers to something real but unrealized. For example, a lump of coal must undergo a process to become a usable energy source. An "edge" signifies something processed at least once, like Levi-Strauss's metaphorical comparison of the raw and the cooked—an element belonging not to nature but to culture. But is this dichotomy of nature or culture sufficient? Rheeda's exhibition title compresses these three words to introduce a third element that transcends binary oppositions. In her artworks, "wave", or “sound” is not root or stem, but flower. Like Lacan's triad of the Real, the Imaginary, and the Symbolic, sound is relational rather than substantial.
  If the body is akin to raw material, the edge is the next step in refinement—comparable to cutting a gemstone—and sound is the moment when society confers symbolic value. Only when a raw stone enters the fetishistic structure of society does it become significant, facilitating communication and exchange. Auctioneers, for instance, amplify value by eliciting gasps from buyers—sound bursts at the peak of value. In Rheeda's works, beeswax, one of her frequently used materials in recent exhibitions, and oil paint, the primary medium of painters, all embody the "body." These materials, once processed by the artist's hands and applied to a refined surface such as canvas or paper, represent the "edge." The drawings in this exhibition, which occupy an entire room, demonstrate the dramatic transformation of the "body" as paint is spread thinly onto paper using a tool created by the artist to form symbolic shapes. Rheeda's works transcend the modernist definition of painting as "a flat surface covered in paint." Here, the body and the edge figuratively seek to be sublimated into sound.
  Unlike language or music, sound does not operate through grammar. Vision, as the dominant sense in art, is intricately bound with concepts—whether common sense, solidified ideologies, or transcendent metaphysics. Rheeda has explored various materials in an attempt to break free from this conceptual visuality. In contrast to vision, sound possesses a tactile quality. A good sound blows in like a refreshing breeze, and high-fidelity audio equipment delivers sound that can be felt throughout the listener's entire body. The world of signs from which the artist draws inspiration is also attuned to a more primordial era. Of course, it is a visually tactile world. Were it otherwise, it would be reduced to something like braille. The subtle sense of space created by the added layer of wax differs from the idealized vision of modernism, as it cannot be grasped in its entirety at a single glance. The works in which strokes overlap within a square frame and their shadows are reflected from the background continue from her previous works.
  Even though these forms remain unreadable, they unfold with power and decisiveness. As Roland Barthes argued, rather than simply reading (which often leads to consumption), Rheeda’s works invite writing. The branching lines of letters, fragmented strokes reminiscent of abstract brushstrokes, demand hermeneutic imagination. Like relics, the forms in her works are not complete shapes but traces, filled with gaps—relics that provoke endless interpretive engagement. According to Umberto Eco, such incomplete signs, like open works of art, stimulate continuous interpretive activity. This hermeneutic process is shared by archaeology, history, science, and art. It was only in modern times that painters secured artistic autonomy, the aesthetic principle that painting refers to nothing beyond what is visible. However, there was a much longer history of communication before autonomy. Rheeda's works, therefore, require a semiotic rather than purely art historical approach. In Histoire de la sémiotique, Anne Hénault quotes Saussure's assertion that concepts do not exist before they are given form through language.
  According to Saussure's theory, the common qualities shared by all languages are difference and systematicity, which are considered inherent conventions within all systems of meaning. In a semiotic context, Rheeda's seemingly incomplete signs may be distant from transparent communication, but the segmented lines emphasized in a stroke-like form represent a "system made of differences" (Saussure). However, being in a primitive stage, they are not systematic. The multilayered screens that enhance the sense of difference imply meanings that are not explicitly conscious. The unique material used by Rheeda, beeswax, evokes Freud's "magic slate," as referenced by Jacques Derrida in Writing and Difference. The magic slate is a toy that allows one to write something, lift it up, and erase the previous writing, enabling the act of rewriting repeatedly. However, the continuous traces of writing remain on the wax tablet, and under appropriate lighting, they can be read. Freud posits that the wax tablet essentially represents the unconscious.
  The alternation of writing being erased and then reappearing can be compared to the manifestation and disappearance of consciousness in memory. Rheeda's screens, which seem to leave traces of the past, also create new spaces of inscription. Before signs, there must have coexisted primordial forms that were neither signs, objects, nor images. The artist has focused on the spaces in between. Those on the margins are neither this nor that, yet simultaneously both. The hieroglyphs, which are partially mixed images, become significant mediators. In the history of communication, the invention of paper can be viewed as a revolutionary event comparable to modern computers, as signs were carved onto objects such as rock, tree bark, and clay for much longer. By applying a thick layer of translucent wax to the canvas and drawing images/signs over and under, Rheeda is making a choice that approaches the 'PROTO-' stage. In the conventional practice of painting, wax is considered a "foreign substance" that obscures what has been painted or colored, but in Rheeda's works, it produces a unique effect.
  Just like her 2021 solo exhibition, Sway, the multilayered images, warmth, and tactile qualities stand out. This translucent substance, reminiscent of Vaseline applied to damaged skin, seems to assist in the restoration of fragmented signs. Among such materials, the most famous is the mass of fat that Joseph Beuys used throughout his life, signifying healing and restoration. The fragments that have fallen off from somewhere activate the contact between one another to find the lost links. Brush strokes painted in different colors further emphasize the intricate patterns. In Rheeda's paintings and drawings, the forms are sensual. The paintings embody a tactile surface that violates the taboo of not touching. Of course, the touch of oil paint also retains a certain visual tactility. This aspect is crucial for painting to maintain its identity amidst the inundation of spectacle. Rheeda encounters tactility in her journey not for the sake of a plausible pictorial aura but to return to a more primordial sense. She also has plans to expand the use of wax into dimensions like relief or sculpture.
  When touched lightly, the feeling is not of material but of organic matter. Typically, paintings glide onto perfectly prepped canvas or smooth paper, but Rheeda's paintings, which have long restrained the use of brushes, fall somewhere between drawing and making. The multilayered screens created through various materials and techniques evoke the artist's background in studying multiple fields of art simultaneously. The PROTO_Drawing series, which will fill a small room in this exhibition, is also drawn using the "aluminum brush" created by the artist. This drawing, utilizing the elasticity of metal plates like a rainbow calligraphy, becomes a playful medium as free as a brush. The metal plate drawing, which is not as soft as a brush, is free from its referent while featuring segmented forms essential to symbolic abstract painting. It combines a variety of colors with segmentation and flow, similar to the PROTO_Painting series. The establishment of potential movements between the works through the Homogeneity series is likewise significant. The artist seeks to escape from the traditional media of painting while also distancing herself from typical visuality.
  Tactility has often been regarded as a subordinate sense, along with hearing, in comparison to vision. The process of regressing to the primordial stage prompts reflection on the visuality considered a higher sense. Jacques Derrida, citing Levinas in Writing and Difference, asserts that sight, in and of itself, does not respect the other. Levinas places sound above light, viewing thought as language, which we traverse not along paths akin to light but along those akin to sound. According to him, hearing relates not to color or shape but to the vibrations of sound and the physical. Jacques Derrida claims that speech and writing must once again become gestures to truly perform their functions. In these gestures, logical and discursive intentions are minimized or subordinated. Derrida hopes that the division of language and logic will reject the suppressed gestures that linger in every word—those cries that have not yet been fully cooled. The ideal artist he exemplifies is Antonin Artaud, who attributed value to onomatopoeia.
  This playwright guides the audience to the threshold of a moment when words have not yet been born, which is neither mimetic language nor the creation of nouns. It is a return to the origins of language, rather than a representation of a script. Artaud sought to reclaim the ancient magical effects through a state where gestures and words are not separated. Was there not sound before the sign? The language that defines human identity is learned by hearing and absorbing sounds from the other, often represented by the mother. This process is unconscious, unlike the later acquisition of foreign languages or scientific codes. The artist refers to this as “instinct of abstraction”. Viewing abstraction in art history solely as an evolution of concepts is only one aspect of the truth. In Rheeda's works, made of layered surfaces, what lies beneath can always come to the surface, and the reverse is equally true. Providing various pathways between consciousness and the unconscious, she paralleled keywords such as ‘body, edge, wave.'
  The movement that the artist aimed to convey through the keyword 'wave', or sound is inherent within individual works as well as among the series. The PROTO-Drawing series evokes the wave of sound, akin to a melody, while the PROTO-Painting series features a harmonic blend of various timbres. The movements represented by sound evoke a sense of life. To be alive is to act. The act of writing forms or characters that appear to come alive, as expressed in the term ‘kiunseongdong’ (rhythmic vitality), has long been a desire in Eastern aesthetics. While there are currents such as abstract letters or calligraphic abstraction that continue this tradition, in Rheeda’s case, rich colors are added. If we compare the artworks through metaphor, Rheeda’s works resemble not a scholar adept in conceptual narratives but rather an active modern woman. The wax-coated surface emits light, interacting with a variety of pastel tones. There is no need to deliberately avoid the universal tradition of decoration.
  Before the 'higher' instruments like pencils or brushes, strokes emerging from objects unrelated to the function of writing became PROTO-Drawing. These forms seem to be engraved onto materials, reminiscent of ancient conventions. According to Rheeda, brushes sensitively reveal the individual, but they are not the typical representation of a stroke. She prefers strokes that are free from the brush. The artist, who is skeptical of brushes, experiments with strokes that do not involve them. Rheeda, who seeks to relativize the brush, actively incorporates computer processes. Even when I first saw the artist at the Bakyoung Residency over a decade ago, she was working with vinyl sheets or airbrushes instead of canvas and brushes. The use of computers, along with the time it takes for paint to dry on multiple layers, ensures that Rheeda's works are created under meticulous planning. Yet, the completed forms are imperfect signs. This imperfection demands continuous supplementation. Messages are not read as perfect signs sent by the sender but require the recipient’s collaboration.
  Multiple layers, including shadows, coexist on the surface where the images are placed over and under the wax treatment. The neatly painted shapes in oil are not images but signs, not precisely referring to something but existing in a stage before or after being a sign. The wax that forms the lower layers of Rheeda's screens is, in fact, an ancient artistic material used since Roman times. The old medium, possessing a milky hue akin to faded paper, transforms into a more solid structure through the artist's unique handling while retaining its essential qualities. The translucent materials evoke the sense of space found in ancient cave paintings or petroglyphs, where layers are continuously built upon one another. Like the text inscribed on parchment before the invention of paper, the allegorical, multilayered process obscures what is depicted, adding an opacity to the imagery. While ideal signs are characterized by their transparency in conveying messages completely, primordial signs are not transparent. Rheeda's signs even possess shadows, much like reality.
  In every field, the indicator of progress is overcoming the resistance of matter, and art is still in struggle. Painting continues to maintain its connection with the body because the body itself cannot be fully codified. In an era of information technology that codifies what once existed in reality, the body remains an essential condition of painting that resists complete codification. The artist seeks to return to the source of signs and ultimately suggests the essence of painting that transcends signs. Similar to deconstructionism, sign forms that are 'placed under erasure' are imbued with meaning through a continual series of differences rather than being treated as essence or object. If the system of signs, which represents difference, is imperfect, it requires time doubly. Ernst Cassirer states in Der Begriff der symbolischen Formen im Aufbau der Geisteswissenschaften that consciousness cannot be liberated from the form of time. According to him, the distinctive essence of consciousness is rooted in and based upon the form of time. Signs that follow the axis of time drift and are not fixed.
  Unfixed signs are mysterious. The semiotician Umberto Eco refers to the characteristic of ‘mystical drift’ in The Limits of Interpretation, describing a process where one slides from signifié to signifié, from similarities to similarities, linking one connection to another. Of course,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the ancient and the modern. Ancient semiotic phenomena do not assert the absence of a universal, univocal, and transcendent signifié seen in modernity. According to Eco, ancient semiotic phenomena presuppose a powerful transcendent being—namely, a Neoplatonic absolute being—therefore allowing everything to point to everything. In The Limits of Interpretation, the Neoplatonic absolute existence, the unspeakable source of the whole, the void, and everything, acts through an interreferential and labyrinthine web to connect everything with everything else. Just as all great texts of this world, ancient semiotic phenomena confirm not the absence of signifié in every text but the completeness of the signifié. The ultimate signifié must remain an inaccessible secret.
  In contrast, "reality emerges as a continuum where no absolute entities exist, allowing for infinite interpretation" in modern semiotic phenomena (Peirce). According to Peirce, such labyrinthine journeys of signs and objects have no purpose other than the joy of the journey itself. Through the exploration of primitive signs, Rheeda's works approach modern painting with a sense akin to encountering an unknown language. When meeting an unfamiliar language whose meaning is unknown, form and sound come first. The unreadable forms resemble images, and the incomprehensible language is amplified by sound. This serves as an aesthetic strategy that brackets meaning and objects, directing focus towards form. The rhythmic reading of “덩어리 모서리 소리(Body, Edge, Wave)' due to the repeating endings shares a commonality with the remainder that is not segmented or marginalized. The forms of the works give a residual feeling. Clearly uncodified and unclassified remnants are often othered. However, modern philosophy asserts that the core of identity is precisely the oth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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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면 우리는 언어의 명쾌함에 중독되어 있다. 생각을 표현하거나, 무엇을 묘사할 때, "밝다" "노랑", "힘들다", 등의 언어로 표현한다. 어떤 현상이나 감정이 떠오르고 그것에 알맞은 언어를 맞추어 말하기보다 언어로 사고한다. 이다 작가의 전시 제목인 는 문자로 추정되나 비교군이 없어 해독하지 못한, 기원전 고대 문자를 뜻하는 "Linear A"에서 빌려왔다고 한다. 

 'LINEAR A'시리즈에서 이다는 마스킹된 구멍에 물감을 칠하고 그 위에 반투명한 왁스를 바르고 굳힌 다음, 위에 다시 마스킹된 형상을 뒤덮는 테크닉으로 이미지를 만들었다. 실크스 크린처럼 회화에서 붓의 흔적을 지워 깔끔한 모양으로 드러난 원색의 모양을 보고 있으면 명쾌함과 산뜻함 이면의 감각이 느껴진다. 왁스 특유의 빛을 머금는 성질과 유화의 빛을 반사시키는 물성의 차이도 감상 포인트의 중요한 요소로 작동되어, ‘불분명한 명쾌함'이라는 양가적 감각을 시각과 촉각으로 동시에 자아낸다. 알 수 없는 언어와 코딩으로 이루어진 추상 이미지는 디지털에서 누락된 촉각성을 획득하며 왁스 캔버스로 명확해진다.

  동양에선 서예가 문자를 중심으로 미적 아름다움을 표현하여, 그 결과로 작가의 인격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다 작가의  시리즈는 서예보다는 코딩의 일부를 보는 듯 그리는 사람의 의도를 지운 것 같지만,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예상 밖의 작은 디테일들로 작가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작은 흔적들에서 느껴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작은 감정들이 아마도 '인격'의 새로운 기준이 아닐까?■
LINEAR A
 






Trần Minha (미술비평) 
 < LINEAR A > 전시서문 (더 스토어,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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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AY'
 

< 일렁 > 전시서문 (갤러리 이마주, 2024)










이다 작가는 평면 캔버스의 표면을 ‘세계와 만나는 경계/피부’로 보고 이를 구체화 하고자 다양한 재료와 방식에 도전해 왔다. < 일렁 > 전시에서 선보인 Sway 연작에서 작가는 우레탄 페인트로 가늘고 무심한 가로선을 수없이 쌓아 그리고 갈아내기를 반복하거나, 공업용 스프레이를 이용하여 안료를 도포하여 가로선을 쌓고 지우는 행위를 반복한다. 회화의 태생적·실존적 조건인 납작하고 평평한 표면에 마치 지층의 단면처럼 구현된 무수한 물리적·시각적 층은 시간의 층이자 지난한 수행의 층이다. 이는 촉각 뇌를 자극하는 일렁임의 장소가 되어 공감각적 심상을 호출하며 깊이를 구현한다. 세월이 피부에 쌓여 드러나듯, 작가의 수행의 시간이 쌓은 깊이 있는 표면은 촉각적 공간감으로 인해 마치 숨 쉬듯 일렁이는 회화적 표면이 되어 세상과 만난다■


  Rheeda calls the surface of a canvas 'the boundary/skin that meets the world' and has been challenging various materials and methods to reify it. In the Sway series presented in the  exhibition, she repeatedly piles up and grinds urethane paints in thin and nonchalant horizontal lines or uses industrial spray to stack up and erase pigments over and over. Innumerable physical and visual layers materialized as a cross-section of a stratum on a flat surface, which are the natural and existential conditions of painting, are layers of time and exhaustive practices. It becomes a place of vibration that stimulates the sensory processing of our brain, which calls for synesthetic images and visualizes depth. As the time accumulated on the skin, the deepened surface concentrated by the artist's time of practice becomes a pictorial facet that meets the world, breathing with the tactile sense of space and time■

‘표면’이라는 이미지
    
  그림의 표면은 마치 피부와도 같다. 세상과 나의 경계로서의 피부가 나 아닌 것과 구별하는 나/존재의 최전선이라면 그림의 표면은 작가의 감각이 세계와 반응하여 침전된 몸의 흔적이자, 감각의 구현으로서의 최전선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시인 폴 발레리 가 “가장 깊은 것은 피부”라 말했을 때, 그 ‘깊이’는 단순 물리적 의미는 아닐 것이다.  이다는 ‘그림의 피부-표면’에 오래 전부터 천착해 왔다. 에나멜 페인트의 매끈한 라인으로 단순한 형상을 그렸던 초기 작품 에서도 압축된 형상이 소환하는 심상만큼이나 표면-정확히 말해 표면의 촉각성-을 중시했다. 촉각성이라면 얼핏 물성에 의한 표면의 질감을 떠올리기 쉬우나, 이번 신작에서의 작가의 관심사는 우리 눈을 붙잡는 응시의 대상으로서의 표면의 확인 내지는 입증, 다시 말해 시각성이 탑재된 촉각성의 구현에 가깝다. 구체적인 형상을 지우고 얼핏 추상처럼 보이는 이미지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 또한 초기 라인 작업 이후의 지속적인 변화이다. 구체적 형상의 본질적 태를 추출하는 것이 추상의 전통적·일반적 정의라면, 몇 년 전의 전시 < 만질 수 없는 것들 > 부터 이어지는 이번 전시의 작품은 ‘표면’이라는 회화 세계의 본질적 구체성을 꺼내어 펼치기 위해 형상을 지워간 흔적이라는 차이가 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그림 안쪽 세계-환영의 세계-와 바깥 세계-현실 세계-가 만나는 경계/표면을 파고들어 틈새를 펼치고 드러낸다. 그림의 태생적·실존적 조건인 납작하고 평평한 화면은 촉각뇌를 자극하는 '일렁임'의 장소가 되고, 지워진 형상의 자리를 흔적의 이미지들이 대신하여 공감각적 심상을 호출하고 깊이를 구현한다. 그림을 그리는 매순간 갱신되며 작가의 몸에 각인되었을 감각은 그림 표면의 층을 이루며 일렁이는 깊이를 이루고 이는 우리의 눈을 공감각적으로 붙잡는다. 


스며 나아가기

  회화의 역사는 X축과 Y축으로 이루어진 평면에 Z이상의 축을 구현하려는 무수한 욕망의 역사이다. 이 Z이상의 축은 계속 부풀고만 싶은 풍선의 욕망과는 궤를 달리하는 지라,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에만 목적을 두지는 않는다. 이는 양인 척 음으로 음인 척 양으로 또는 양도 음도 아닌 어느 곳으로, 미세한 긴장을 오가는 줄다리기이자 게임이 되기도 한다.  에어스프레이로 드로잉 후 가로선을 반복하는 이다의 작업 또한 지난한 수행이자 이미 그려진 층과의 긴장의 연속이다. 붓이 아닌 공업용 에어브러시를 사용한 작업 과정은 자의적인 내적 표현이나 주관을 전면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순간의 즉흥적 판단을 필요로 한다. 이런 방식과 태도는 동양의 발묵법**에 견주어 볼 수 있다. 언뜻 보이는 결과물이 발묵법과는 다소 다를지라도, 내적인 표현이나 작가의 주관을 전면적으로 표출하지 않으며 특정 대상이나 공간을 그리고자 하는 의지 또한 드러내지 않는 그림 과정상의 몰입의 정도나 태도의 측면-거리두기-은 발묵법의 그것과 비교 가능하다. 이전 그리기 단계가 만들어낸 층을 단서로 삼아 다음으로 나아가는 작업의 과정은 혹여 우연적으로라도 만들어질 수 있는 구체적 형상을 해체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가로선 긋기 또한 재현을 해체시키기 위해 이전 에어브러시로 그린 과정에 반응한 다음 단계로서의 행위인 것으로, 수평선 자체의 독립적 의미나 표현적 의지 자체가 강한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수평의 직선은 마치 거기 있었던 것처럼 오히려 일렁임 속으로 자연스레 스며든다. 


응시의 거리
  
  노을은 우리의 눈이 착시해 낸 가짜이다. 이 사실을 처음 알고 잠시나마 세상의 아름다움에 뼛속 깊은 허망함을 느낄지라도, 우리 눈이 그러한 착시를 만들어내는 능력까지 겸비했다는 신비로운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허망함을 철회하고 다시 아름다운 시선으로 노을을 바라볼 수 있다. 우리는 대상을 응시하며 사랑을 강화한다. 사랑받는 대상은 그 응시의 눈빛과 몸짓 때문에 처음에는 황홀하나, 일정 정도 진행된 후의 사랑에서 응시만큼 거추장스럽고 피곤한 것도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방법으로 응시했다 할지라도 사랑이 완전히 소멸된 후의 응시는 끔찍한 올가미로 바뀌는 법이다. 같은 방법의 응시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것은 ‘자연의 풍경’ 밖에 없는 것일까. 나무와 바다와 하늘처럼 늘 같은 자리에서 소리내어 반응하지 않는 존재들만이 응시를 견딘다. 창문 너머 바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폭풍 속 나무들의 헤드뱅잉을 볼 때처럼, 구경할 수 있는 거리가 확보되었을 때에만 그리고 바람막이 같은 유리벽이 존재할 때에만 사랑과 믿음이 아름답다는 설파가 통한다.  이다의 이번 전시는 그 응시의 거리를 구현한다. 작품들은 그것이 어떤 형상인지 명확히 말하길 미루며, 일정 거리에서 우리의 응시를 유혹하는 동시에 지연시킨다. 일렁이는 깊이를 느끼며 가까이 가는 순간 그것이 켜켜이 쌓인 평면의 표층임을 인지하게 될지라도 그 일렁임과 함정에 우리의 시선은 기꺼이 투항한다. 달콤한 거짓말이자, 함정마저도 즐거운 나의 집 같은 지점이다. 라틴 팝 ‘Sway’***의 노랫말처럼.


          When marimba rhythms start to play
          Dance with me, make me sway
          Like a lazy ocean hugs the shore
          Hold me close, sway me more
          Like a flower bending in the breeze
          Bend with me, sway with ease
          When we dance you have a way with me
          Stay with me, sway with me ■







'일렁’에 대한 메모










이주연* 
 < Sway 일렁 > 전시비평 (영은미술관,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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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연은 이다의 본명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간략한 자기 평론인   동시에 작가 노트이기도 하다.

**  필(筆)이나 준법을 쓰지 않고 형태를 그리는 방법으로, 순전히 습묵(濕墨)으로 그려 붓의 흔적을 볼 수 없는 것과 붓을 사용하지 않고 손, 발 또는 머리카락으로 그리는 것, 마음에 아무런 계획도 없이 붓이 가는 대로 맡겨 임시로 변화를 가져오는 것 등을 모두 통칭하는 즉흥적이고 사의적인 묵법이다. 단순히 기교만을 뜻하지 않으며 주체가 대상을 그려나갈 때의 몰입의 정도나 태도-거리두기-까지 참조되어야 한다.

***딘마틴(Dean Martin)의 1954년 곡으로 푸시캣 돌스(Pussycat Dolls), 마이클 부블레(Michael Buble) 등 많은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 되었다.



가변적 완성형의 
현재




김영훈 (안나푸르나 출판사 대표)
‘생각의나무’, ‘오픈하우스’ 등의 출판사를 거쳤다. 
문화와 예술을 다루는 책을 주로 만들며, 가끔 관련한 글을 쓴다.



< SWAY 일렁 > 전시서문 (영은 미술관, 2020)


















  이다의 개인전에 글을 하나 써주기로 해놓고 그림을 보러 ‘영은미술관’으로 갈 때, 차에서 엔리오 모리꼬네(Ennio Morricone)의 세 장짜리 컴필레이션 CD를 재생했다. 그날이 7월 7일이었는데, 전날인 6일, 영화 음악 역사상 최고의 거장이라고 할 엔리오 모리꼬네가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음악은 나와 한없이 무관했지만 한없는 혜택을 주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으로 그의 음악을 들으며 운전을 했다. ‘영은미술관’은 세 장을 들을만큼 적당히 멀어서 비탄에 젖어 차를 몰았다. 음악을 들으면서도 이다의 그림을 생각했다. 작가는 나에게 작품을 찍은 사진을 주면서, “그림은 직접 봐야할 거야”라고 했는데 ‘그 뜻이 뭘까’ 생각했다. 출판 일을 하는 내게 미술 작품과 관련한 글을 써달라고 했을 때, 거절하지 않고 흔쾌히 허락한 일은 평소 미술과 관련한 글을 읽으면서 너무 어렵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을 보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쉬운 문장을 써보면 어떨까 싶었다.
 
  작업실을 둘러싼 이다의 여러 ‘SWAY’의 첫 느낌은 산뜻했다. 빈 마음을 채운 건 색이었지만, 색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전 이다의 작품에도 원색의 사용은 빈번했었다. 색만으로 전해지지 않는 산뜻함이다. 무심히 가슴에 호의가 느껴졌다. 그렇게 십여 분 작품을 보고 있으니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림에 바짝 붙어 보다가, 멀어지자 내 눈은 초점을 제대로 잡지 못했고, 그런 상황이 반복되자 어지러움을 느꼈다. 작품을 가깝게 보고자 했던 것이나, 좀 더 자세히 작품에 다가가서 보고 싶었던 이유는 쉽게 머릿속에 질감의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난해했다. 나는 이다에게 이야기를 듣고서야 겨우 그 이유를 추론했다. 작품은 먼저 밑그림이 될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 나중에 부분은 수평으로 쌓이는 수직의 선 안쪽에서 은은히 빛나는 실루엣처럼 느껴진다 – 이후 마스킹 테잎 작업을 하고 에어브러쉬로 완성을 하는데 이 작업은 매우 가변적인 것이어서 본래의 밑그림과 무관한 형태로 즉 예상과 다르게 변하기도 한다고 했다. 이미 밑그림이 그려진 상태 위에 마스킹 테이프를 붙인 정형화된 공간을 에어브러쉬로 칠하기 때문에 ‘차이’가 분명히 느껴지면서 질감을 만든다.
 
  내가 처음 이다의 작품을 보았을 때는 낡고 좁은 작업실에서 채색이 없는 선화를 그리고 있을 때였는데,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것은 대상을 한없이 단순화시키는 작업이었다. 그리하여 앙상하게 남은 것만이 그 대상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다음에 본 전시에서 그 대상이 사라지고, 무엇인지 아리송한 게 그려 있었다. 기회가 되어 그 작품 중 두 점을 사서 한동안 집 거실에 걸어 놓았다. 그 두 점의 그림은 내 삶의 긴장감을 유지해주는 작품이었다. 그때 내 느낌은 파편화한 사물을 흩뿌려 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된 물건을 새것처럼 만드는 Youtube 채널을 가끔 넋을 잃고 보는데, 중요한 건 새것처럼 만들기 위해 제일 먼저 물건을 완전히 해체하는 작업이다. 해체가 그렇다. 언제나 시작이다. 그 무렵 우리의 대화를 기억해보면, 이다는 사회와 그 속의 인간에 관하여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을 했었다. 그런 생각이 고스란히 작업에 남았던 것 같다. 이다의 다음 전시를 보지 못했다. 연락이 없어서 갈 수가 없었다. 이번에 글을 쓰려고 찾아보니 파편화한 것들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은 작품을 만들어 놓았다. 나는 이다에게 “불편하다”고 말했다. 그 불편함은 아마도 이다의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들이 무언가를 꾸며서 아무리 멋지게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 작품보다 솔직한 모습은 드러나지 않는다.
 
  이다의 작품은 전 작업에서 완전히 새로워진 것은 아니지만 몇몇 장치를 만들어서 새로운 느낌을 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중대한 동작은 가변성이다. 작가는 자신의 함수를 만든 후 함수가 작동시키는 범위를 떠나려는 장치를 만들었다. 이런 장치는 현실적이고 또 합리적이다. 수학만으로 세상을 설명할 수 없다. 화이트헤드(Whitehead)이래 서구의 과학자는 이미 그런 과학만으로 세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다가 추구하는 가변성은 아마도 과학자들이 느꼈던 한계처럼 그 가변성 안에 우리가 할 수 없는 진실이 있다는 믿음 때문일지 모른다.
 
  몹시 어지러움을 느껴서 나는 작업실 밖으로 나가 자연 속의 사물을 보고 정신을 차리고, 다시 ‘SWAY’를 보았다.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패턴과 단순함, 그에 반하는 장시간의 노동을 생각해보면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좁은 시간과 사유의 간격에서 나온 것임이 분명하다.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축적된 예술적 영감이 쏟아지듯 작품으로 나온 것이다.
 
  그림을 전혀 공부한 일이 없는 문외한이지만 문장에 관해서는 약간의 고려가 있는 사람인데, 고전에서 ‘문장은 저절로 써진다.’라는 말이 예술론에 그대로 확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응축된 사유가 그대로 문장으로 써질 때만이 비로소 ‘문장’이기 때문이다. 가능성을 이야기하기에 이다나 나는 늙었지만 그러한 사유가 깃들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고 또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은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섣부른 이야기겠지만, 이다의 삶이 어떻게 변화할 수 없는 것처럼 그의 그림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지 모른다. 그의 삶이 안정되면 그의 그림에서 안정을 볼지도 모르겠다. 그게 좋은 일인지 어떤 일인지는 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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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이다는 알루미늄이나 포마이카 판, 장판, 커튼 천막 등 위에 공업용 도료를 사용하여 확장된 의미의 드로잉을 선보여 왔다. 그 연장선 상에서, 그리기와 지우기, 칠하기와 긁어내기가 얽혀있는 이번 새로운 ‘Silver Painting' 시리즈는 재현으로 고정된다기보다는 과정을 드러내며, 대상도 물질도 아닌 단계에서의 불연속적 틈을 강조한다. 문장이라 본다면 산문이 아니라 조각나고 중첩된 기표들로 이루어진 알레고리적 시에 가깝다. 이다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이러한 단계에서 드러나는 기호들인데, 이들은 작품이 놓여진 외부의 환경이나 빛에 따라 변화하는 관계를 포함한다. 는 언뜻 산수화처럼 보이나, 도료의 물성에 의해 표면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건, 현상들이 기호적 요소들과 충돌하며 생기는 다양한 연상의 장이기도 하다. 다양하게 반사되고 반영되는 은색의 표면을 통해 그 연상적 의미는 그림 안에 단일하게 갇혀있지 않고, 보는 이의 시점에 따라 그림 밖 외부로 확장된다.
작가의 단일한 독백보다 다성적 대화를 지향하는 이번 Silver Painting 시리즈를 통해 작가는 의미들의 다양성과 불완전성, 제시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생략들, 대상과 현상 사이의 관계를 다층적으로 들여다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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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ver Painting


 
 < 은빛 루머 Silver Rumor > 전시서문, (금산 갤러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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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ing-Tracing'
작가 노트

 이다
< Trackin-Tracing > 전시 작가노트 (갤러리 박영, 2015)

















  독립되거나 단절된 한순간의 시각적 경험이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형상의 지각은 무수한 기억들, 다시 말해 우리의 마음속에 잠재적으로 작용하는 기억 흔적의 영향력에 쉽게 물든다. 현재 순간의 경험과 지각이란 그 사람의 지금까지의 생애에 있었던 무수한 감각경험(sensory) 가운데에서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한다는 데에서 「Tracking_Tracing」 작업은 출발한다. 생경한 대상이든 익숙한 대상이든 우리가 일단 어떠한 풍경이나 사물을 경험하게 되는 순간, 단지 눈에 와서 닿는 자극만이 아닌 그 이상의 것에 닿고자 하는 시도는 암암리에 진행되기 시작하는데, ‘그 이상의 것’이란 우리의 마음속에 잠재적으로 작용하는 일종의 기억 흔적들이다. 이 기억 흔적이란 자전적이거나 개인적, 또는 사회적인 의미를 갖는 개개인의 무수한 경험에서 감각되어 인식 표면으로 부표처럼 떠오른 얼룩들이며 인식 표면에서 지속적으로 조작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어떠한 이미지를 보게 될 때, 그 새 이미지는 주로 ‘시각적 유사성’에 근거하여 과거에 지각되었던 형상에 대한 기억의 흔적들을 불러낸다. 다소 임의적이거나 자의적 또는 관습적일 수 있는 ‘시각적 유사성’을 기반으로 불러내어진 이 부표들은 부재하는 대상을 환기시키는 능력이 있는 기호들인데, 이러한 인식 과정은 리얼리즘에 근거하여 실재 대상을 확인 한다기보다 유사성에 근거하여 무엇인가를 가리킨다고 상상하는 도상적 행위에 가깝다. 부재하는 대상이 환기된다는 것은 대상이 부재함을 확인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대상에 대한 속박이 없는 만큼, 우리의 욕구와 욕망은 기억 흔적이 미치는 압력의 방아쇠에 강하고 깊게 작용한다. 우리의 욕구와 욕망이 부표를 향해 던지는 낚시줄에 긴장을 가해 우리로 하여금 어떠한 대상을 일정한 지각 특징을 가지는 대상으로 보게끔 요구할 때 기억 흔적의 압력 수위는 높아지고, 우리가 무엇을 보았는가는 마치 정답 없는 로샤 테스트(Rorschach test)처럼 우리를 드러낸다.
  이전 「Pseudo-Icon」연작에서 이어지는 「Tracking_Tracing」 연작에서 나는 풍경이나 사물을 쫓아 그리되 풍경이나 사물을 대상으로 그리지 않고자 했다. ‘풍경’이라는 기억 흔적을 끌어올릴 부표들을 부유시키는 한편으로, 거울처럼 대칭을 이루는 가상의 심리적 공간을 통해 부표를 주저하게 만들며, 부표를 당겼던 낚시줄의 긴장까지 인식 표면으로 꺼내어보고 싶었다. 작업은 이미지의 실루엣이나 특징적 라인을 잘라내어 일종의 스텐실(stencil) 기법으로 제작되는데, 이 과정을 거칠수록 본래 풍경 이미지를 품고 있던 포지티브(positive) 이미지들의 조각이 네거티브(negative) 이미지들의 조각이나 배경의 무늬들과 그 중요도에 있어 별반 차이나지 않는다고 느껴졌으므로, 스텐실의 조각, 파편들은 그림과 같은 이차적인 흔적으로 재활용 재구성되기도 하였다. 프린트 혹은 기계자수 놓여진 패브릭은 캔버스 대신 사용되었는데, 이 레디메이드(ready-made) 이미지들은 도료의 분사량과 분사 방향에 따라 무늬가 드러나기도 하고 지워지고 가려지기도 한다. 이러한 표면의 무늬들은 산이나 나무 등 그려진 대상으로의 직접적인 관심을 방해시키며 잡을 수 없는 흔적처럼 드러날 것이다. 가구 제작용 포마이카를 베이스로 사용했던 ‘Pseudo-Icon’ 연작에 이어, 이번 작업에서 사용된 홈패션용 원단들과 그에 따르는 레디메이드 이미지들, 스프레이에 의한 인공적인 바림질 등은 이전의 작업들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동시대의 일상성과 그 안에서의 시각성을 반영한다. 정답은 없고 답은 많은 오류난 답안지와 같은 이러한 흔적들에서, 나는 정답 없는 질문을 찾는다. ■

  

  2012년 1월 서울대학교 우석 홀에서 열린 이다(Rheeda)의 ‘False truth’전과 6월 박영 갤러리에서 열린 ‘Tracking_Tracing’전은 비(非) 미술적인 재료로 현대회화의 문제를 정공법으로 다루는 전시로 주목된다. 그녀가 다루는 정공법의 대상은 현실과 회화적 현실과의 관계이다. 화가는 구별될 수 있는 두 개의 현실과 관계를 맺는다. 양자 간의 혼돈은 작가 개인을 위해서나 작업을 위해서나 바람직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현실이 아니라, 그 관계이다. 그런데 그 관계의 중심에 작가 개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정공법을 위해 빠져 줘야할 것들이 꽤 있다. 그 중하나가 사적 개인이다. 근대예술의 신화 구축에 큰 기여를 했던 개인(창조자, 천재, 자아)은 현대예술에서 좌천된다. 근대적 주체는 재현이나 표현이라는 주/객체를 대립시키는 형식과 더불어 해체되었다. 이다의 작품에서 새하얀 눈이 덮인 듯 순도 높은 캔버스 한가운데 안착되어질 작가 고유의 세계 같은 존재론적 신화는 흐릿해진다.
  이다의 작품은 그것을 통해 작가의 심리적 세계를 들여다보는 따위의 독해를 통해서는 극도의 허허로움 외에 아무것도 읽어낼 것이 없다. 하기야 허허로움이야말로 현실을 지배하는 코드들을 걷어내면 드러나는 가장 적나라한 정서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작업에 대한 열정은 그러한 허허로움조차 하나의 강렬한 표현으로 고양시킨다. 현대사회에서 타자인 화가, 그 박탈당한 자에게는 고양의 계기가 주어지는 점은 나름의 위안이 된다. 복잡한 현대사회의 왜곡으로 인해, 역설은 현실과 진실의 관계를 파악하는 유력한 방식임을 현대미술이 잘 보여준다. 이다의 작품에서 역설은 실제 작품과 상당한 개념적 밀착도를 가지는 전시제목부터 출발한다. 여러 인생의 경로 중, 아마도 예술을 선택하게 됨으로서 시작되고 더 강화되었을 그러한 허허로움은 오직 작업을 통해서만 충만으로 전화될 수 있다는 점에, 작가의 절망과 희망이 동시에 놓여있다. 그것은 작가라면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다.
  작업하는 삶으로부터 비롯된 고난은 오직 작업을 통해서만 풀려진다. 막혀있던 작업이 작업 외의 것으로 인해 풀리는 경우조차, 작가가 작업이라는 가장 중차대한 줄기를 놓지 않고 있는 가운데 가능할 따름이다. 화가가 붓을 쥐고 있는 동안에만 행운은 결정적으로 포획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행운은 행운인지 아닌지도 모른 채 그 곁을 스쳐 지나가고 말 것이다. 작품은 단지 꿈꾸거나 생각하는 자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작업의 중심에 작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중심에 작업이 있어야할 것이다. 작품은 어떤 작가의 결과물이긴 하지만, 이런저런 감수성, 집착, 편견, 이해관계 등 사사로운 자신을 비워냄으로서, 그 작가의 진면모가 드러난다. 온통 1인칭으로 시작되고 끝나는 유아론적 예술은 유일한 개성조차도 아니다. 작가가 아니더라도 현대의 대중들은 자신을 중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에어브러쉬나 에나멜페인트를 사용하곤 하는 이다는 작가의 필적과도 같은 붓질조차 거부하는 듯이 보인다.
  이다의 작품은 보석같이 밀도 있는 하나의 결정체를 만드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이나 개념을 통해 저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휘휘 저어 떠오르는 부유물 같은 느낌을 준다. 현대미술은 이렇게 부유물처럼 떠도는 흔적들 역시, 어떤 의미 있는 행위의 결과로 포용할 수 있다. 갖가지 보이지 않는 금기로 묶여 있는 평면을 엄습한 타자들로 인하여, 동일성은 다양한 타자의 한 항목으로 축소되거나 상대화된다. 그녀의 작품은 마치 니이체가 [짜라투스트라]에서 말하듯이 ‘파편이고 수수께끼이고 끔찍한 우연을 창조하고, 이들을 하나로 만들어 한데 합치는 것, 그것이 나의 창작이며, 목적이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다의 작품은 억압된 타자의 복귀가 잡다한 내용이나 형식의 나열에 의해서가 아니라, 회화라는 형식으로 딱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하나의 판으로 완결되어지는 회화는 상호 무관한 것들조차 모종의 관계망을 요구한다.
  회화는 하나의 평면에 집중적으로 보여 짐으로 인해, 어떤 형식보다도 개념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림에 구현될 개념은 철학적 개념처럼 도식화될 수는 없다. 다양한 인터페이스들이 공전하는 시대에, 그림은 도식을 그려 넣기에 적합하거나 효율적인 형식이 아니다. 도식이란 그려져야 할 것이 아니라, 컴퓨터 프로그램 따위로 짜여 져 실행되어야 한다. 논리적 형식은 손상됨 없이 다른 형식으로 호환될 수 있음에 반하여, 회화적 형식은 그 자체의 목적 또한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화는 투명한 창이나 언어가 아니다. 투명함을 달성하고 싶다면 미술보다는 철학이나 과학을 하는 편이 더 낫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의 불연속성이나 불확정성의 원리, 현대 수학의 불완전성의 원리 등이 말해주듯, 과학의 언어조차도 중성적일 수 없음을 재차 확인하고 있다. 회화는 성급히 내린 지엽적 결론을 보기 좋게 장식화 하는 장도 아니다. 그러나 회화가 개념을 포함해 작가가 편력해온 많은 것들이 총괄되어 관계망을 이루는 장임은 분명하다.
  이다의 작품에서 이 장은 하얀 캔버스 같은 중성적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거듭해서 씌여 진 고대의 양피지 문서처럼 이미 무엇인가로 잠식되어 있다. 오염은 이미 일어나 있으며, 최초의 순결한 출발은 없다. 해체는 일어나 있다. 빈센트 라이치는 [해체비평이란 무엇인가]에서 해체론에 기대면서, 순수 실체, 오염되지 않은 사물, 직접적인 현존, 원래의 대상, 분열되지 않은 기원 등은 필연적으로 허구라고 말한다. 작품이라는 텍스트 역시 마찬가지이다. ‘만일 텍스트가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다면, 이 형태는 단일하거나 잘 짜여져 있거나 유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파편이고 쪼가리이고 깨어지거나 지워진 그물망이다’(바르트) 그러고 보면 잡티하나 없는 하얀 캔버스는 무(無)로부터의 창조라는 신학적 가설과 상당히 조응하는 형식이다. 그 하얀 평면으로부터 상당히 많은 관념이 재현되었고, 관념론적 행위가 실연(實演)되곤 하였다. 화가의 실존적 흔적과도 같은 일획들은 종국에는 진주로 완성 될 존재의 분비물 같은 위상을 지녀왔다.
  반면에 이다의 출발은 중간에 있다. 이미 거기에는 무엇인가 있었고, 그 위에 가해지는 행위로 인해 새로운 관계망이 맺어진다. 최초의 시작은 없다. 최후의 의미도 없다. 무엇으로 귀결될지 모를 단서들만 있다. 회화적 평면은 모호한 단서들을 제시하는 단초일 뿐이다. 캔버스나 유화 대신에 작가가 사용한 포마이카나 비닐장판, 에나멜페인트나 우레탄 페인트는 회화를 위한 전용재료가 아니라, 산업용 재료이다. 그것은 색상이나 재질면에서 강한 이물감을 주면서, 작품 표면의 기표를 거칠게 또는 생경하게 강조한다. 회화의 보편적 재료로 사용되지 않는 이것들은 원래의 기능으로부터도 상당히 벗어나 있으며, 대상도 물질도 아닌 단계를 구현한다. 이다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물화된 기표이다. 스펙터클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처럼 현대회화에도 지시대상이나 기호, 기의에 대한 기표의 우위가 존재한다. 이러한 우위는 우리의 몸, 꿈과 무의식, 언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유하고 행동하는 인간에서 욕망하는 인간으로 방점이 옮겨간 시대에, 대상이나 의미로부터 자유로워진 기표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근거가 모호하며 가볍디가벼운 욕망은 무엇보다도 기표에 달라붙는다.
  19세기적인 리얼리즘에 대한 환상으로 기표에 대한 강조를 기만이나 소외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재 또한 기표들의 중층적 효과에 불과하다. 본질은 거듭된 해석의 결과물인 것이다. 이다의 그림 바탕을 이루는 것은 알미늄 판, 호마이카 판, 장판, 옷이나 커튼 천막 등을 만드는 천 등인데, 눈에 거슬리는 조악한 색깔, 광택, 딸기나 막대사탕 같은 유치한 무늬, 거친 질감에, 붓질이라는 화가의 실존적 행위를 무색하게 하는 공업용 도료의 사용은 작가가 부정하고 싶어 했던 회화적 순수주의에 대한 태도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회화과 박사 과정까지 마칠 정도로 꾸준히 작업하고 연구해오기 이전에, 공예를 먼저 전공했던 작가의 이력은 공예의 기능주의만큼이나 회화의 순수주의를 기피하게 만들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이다의 작품은 그리기보다는 만들기에 가까우며 재료나 소재 또한 일상적이라는 점에서 공예와 관련되지만, 그것이 어떤 기능에 복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회화이다. 아카데미가 추동하는 어떤 본질에의 추구는 분업화된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전문성과 조응하는 이데올로기이지만, 작가란 존재가 실제로 그러한 분업화된 현대사회의 유효적절한 구성원이 되고 있는가?
  몇몇 안 되는 제도적 기관만이 그러한 것이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줄 뿐이다. 이다는 다양한 재료를 활용하는 만큼이나 (변형된)도상의 원천 역시 광고부터 포르노그래피까지 다양한 시각물에 이른다. 그녀의 방식은 한정된 재료나 방법, 본질적 개념 등을 파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하나를 오래 똑같이 못 한다’고 고백하는 이다의 작품은 회화냐 공예냐, 개념이냐 대상이냐 보다는, 차라리 확장된 의미의 드로잉에 속한다. 확장된 드로잉에서는 그리기와 지우기, 또는 쓰기가 잘 구별되지 않는다. 드로잉은 재현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중시하며, 그것이 움직이고 있는 한 빈 공간이 필요하다. 특히 스텐실을 이용하여 흔적과 얼룩으로 이루어진, 최근의 산수화 스타일의 풍경은 불연속적 틈이 강조된다. 문장으로 친다면, 산문이 아니라 시에 가깝다. 조각나고 중첩된 기표들로 이루어진 시는 알레고리적이다. 이다는 이질적 형식의 회화를 통해서 하나의 본질이 아니라 여러 본질 사이의 관계를 탐색한다.
‘False truth’ 전의 [Cityscape #] 시리즈는 일종의 풍경이기는 한데, 작가 말대로 ‘풍경을 그리지 않은 풍경’이다. 아파트 브랜드로 만들어진 형태는 풍경이라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형태이다. 아파트에 살면서 동시에 그 브랜드를 사는 한국 사람들은 자신의 거주지에 상표를 크게 붙이고 산다. 현실은 기호화되고, 기표는 현실이다. 유럽의 성을 닮은 고급스러운 아파트 이미지는 포마이카나 장판 같은 싸구려 재료 위에 붓의 흔적이 남지 않는 에나멜페인트로 그려져 있다. 기표와 기표가 생경하게 맞부딪히는 어울리지 않음은 두 개의 화면을 병치한 작품 [고민의 역전]에서도, 기운 생동하는 붓질을 배반하는 꽃무늬 바탕의 작품 [방금 보던 것이 보일 때가 있다]에서도 발견 된다. 박영 갤러리에서 전시 ‘Tracking_Tracing’전 역시 산, 나무, 돌 등의 도상으로 인해 언뜻 풍경화, 그것도 산수화같이 보이는데, 자세히 보면 풍경을 이루는 이미지들을 여기저기서 수집해온 것이다.
  작가는 [Tracking_Tracing] 연작에서 ‘풍경이나 사물을 쫓아 그리되 풍경이나 사물을 대상으로 그리지 않고자 했다’고 말한다. 흔적은 현존을 부재로 치환한다. 정확한 위치가 없는 흔적(trace)은 ‘현존의 환영(simulacrum)’(데리다)이다. 천에 에나멜페인트로 그려진 [Tracking Blot] 시리즈는 동양화 같지만,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은 잡탕 형태들이 풍경처럼 모여 있다. 그것은 ‘하기’가 아니라, ‘--하는 척 하기’에 가깝다. 데칼코마니 형식으로 펼쳐놓은 작품들은 심리테스트 얼룩처럼, 관객으로 하여금 흩어진 풍경의 요소들에서 무엇인가 길어 올리기를 바란다. 흔적과 얼룩이 특별한 인과 관계 없이 펼쳐져 있는 이다의 작품은 완전한 추상은 아니다. 관객이 알아볼 수 있는 자연, 또는 도시의 도상이 깨진 채 등장하기 때문이다. 추상은 모더니즘의 역사가 알려주듯이, 지시대상으로부터 독립된 언어를 자율화함으로서 생겨난다. 추상에는 자율성을 통해 쟁취한 화면의 순도가 있다. 그러나 이다의 작품은 회화를 회화이게 하는 그 순도를 거부한다.
  작가는 회화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내부로부터 회화라는 형식을 교란시킨다. 화면에 떠도는 것들이 대상이건 기호건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완전히 삭제되어 있지도 않다. 바탕은 바탕대로, 물감은 물감대로, 기호는 기호대로 자신을 드러낸다. 여기저기서 호출한 이질적인 것들을 조화롭게 조율하려는 노력이 부족해, 무엇을 말하려는지 모호한 어수선한 화면을 보여주기 일쑤이다. 그러나 이다의 작품은, ‘무엇을 말하려는가’나 ‘무엇을 전달하려 하는가’의 문제는 1순위에 놓여있지 않다. 캔버스 대신에 사용된, 프린트 혹은 기계자수가 드러나는 천들은 도료의 분사 량과 분사 방향에 따라 무늬가 드러나기도 하고 지워지기도 한다. 이러한 표면의 무늬들은 세계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창으로서의 역할을 방해하는 흔적들이다. 대략 알아볼 수는 있지만 완전하지 못한 기호적 요소들이 떠도는 이다의 작품은, 관객의 시선이 그것을 어떻게 휘젓는가에 따라 다르게 보일 부유물들로 다가온다.
  그녀의 작품에서 기호들은 완전히 나타나지도 않고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는다. 이러한 불완전한 기호들은 대상이나 의미를 투명하게 전달할 수 없다. 이에 대해 이다는 ‘의미화 과정이란 의미가 전달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의미재생산을 공유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바탕의 무늬나 질감과 그 위에 다양한 도료로 그려진 이미지들은 대상이나 의미의 최초의 출발과 목적을 모호하게 한다. 그것들은 다층적으로 공존하며 상호작용한다. 기억들로 물든 지각은 투명한 이해를 지연시킨다. 낚시 밥처럼 드리워진 불완전한 기호들은 혼자만으로는 결핍된 상태에 있으며, 끝없이 다른 것의 보충(supplement)을 요구한다. 부재와 상실을 대리하는 이 끝없는 보충작용을 통해 작가는 ‘정답 없는 질문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불안정하고 불연속적인 운동을 야기하는 이다의 작품은 고유한 자기동일성이나 실체가 아닌 차이와 관계를 통해 접근한다. 회화의 동일성은 타자성(otherness)이나 이타성(alterity)에 의해 가능하다.
  이다는 기원과 궁극의 요소를 모호하게 하고 부차적인 것을 회화의 전면에 놓으면서, 회화를 탈 중심화(중심을 해체) 시킨다. 이질적인 것들이 공존하는 이다의 작품은 단일한 저자의 독백이 들리지 않는다. 저자의 목소리는 다른 소리들에 묻혀버린다. 그녀의 작품은 ‘동등한 목소리들의 다양성들을 포용하는 대화적 또는 다성적’(바흐친) 텍스트인 것이다. 텍스트의 다음성(polyphonic)을 강조하는 바르트는 ‘한 텍스트의 의미는 그 체계의 복수성, 즉 무한한 순환적 전달 가능성이다. 처음에 창조될 때부터 텍스트는 다(多)언어적이며 입구로서의 언어나 출구로서의 언어란 없다’고 강조한다. 캐서린 벨지가 [비평적 실천]에서 말하듯이, 관객 또한 작가와 마찬가지로 작품의 통일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가능한 의미들의 다양성과 상이성 불완전성 그것이 제시하지만 설명하지 못하는 생략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의 모순을 찾아야 한다. 이다의 작품에 작동하는 다양한 계열(series)은 궁극적 요인이 없다.
  마이클 라이언은 [해체론과 변증법]에서 해체론은 모든 철학적 형식의 궁극성, 즉 기초적 공리, 모든 것을 포괄하는 체계, 사물 자체의 현존을 드러내는 것으로 정의되는 진리, 자기동일성, 합당성 등을 와해시키려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과정에 필요한 것이 차이의 역동적인 운동과정이다. 이다의 작품에서 차이는 고정된 몇 가지 항목의 대립관계가 아니라, 계열을 이루는 보다 넓은 연관 속에서 운동한다. 불완전한 기호가 만드는 풍경은 기호의 충만함이 아니라, 풍경을 이루는 요소들 간의 차이에 의해 구성된다. 이다의 작품에서 작동하는 차이들은 해체론의 핵심적인 개념이며, 회화의 고정된 동일성을 해체하려는 전략에도 유효하다. 작가는 다양한 기호와 물질을 활용하며 차이적 관계의 놀이를 한다. 불확정성이 곧 불가지론은 아니듯이, 이러한 놀이는 느슨한 절충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거기에는 긴장이 있다. 여기에는 회화라고 가정된 장에 이질적인 것들을 끌어들이며, 어느 하나로도 환원될 수 없는 팽팽한 관계설정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기호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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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영 (미술 비평
 < Tracking-Tracing > 전시비평 (갤러리 박영, 2015)



*이 글은 갤러리 박영의 
PMP프로그램(평론가 매칭 프로그램)에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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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을 (재)생산하는 
‘유사-도상
(pseudo-icon)’적 
계보학

김재석 (미술비평)
 < Mythomania > 전시비평, (카이스 갤러리 홍콩, 2009)

















  이다(Rheeda)는 대중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재생산된 일련의 시각 이미지가, 우리의 무의식에 저장되어 욕망하는 기계처럼 재현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작가는 (전통적 의미로서의) 화가와 이미지 비평가의 중간 입장에 서서, 유사-인지심리학적 차원의 문제의식을 도출한다. 대중 매체 이미지는 어떻게 우리의 욕망을 투사해, 우리를 자극하고, 우리는 그 이미지를 어떻게 바라보며, 어떻게 그것을 다시 모조하는가?
  작가는 미술사에 하나의 도상으로 자리 잡은 누드 모델의 포즈나, 성적 이미지에 노출 가능한 성인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포르노그래피, 매일 뉴스에서 반복적으로 터져 나오며 일상의 불안을 극대화시켜 역으로 우리를 안심시키는 각종 끔찍한 사건 사고, 혹은 어린 아이들이 갖고 노는 것임에도 어른의 욕망이 투영된 다양한 인형이나 여성 신체를 훤히 드러내주는 수영복과 치마, 성적 판타지를 권선징악의 교훈적 메시지로 그럴싸하게 포장한 만화 등 섹슈얼리티와 폭력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대중 매체의 각종 이미지를 작품의 주 소재로 삼아, 이를 시리즈로 작업한다. 롤리타 콤플렉스를 연상시키는 소녀들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거나 테디 인형과 토끼 인형을 들고 표정이 제거된 채 서 있는 'Girlish', 그와는 달리 루벤스의 작품에 등장할 법한 풍만한 모습으로 도발적인 자세를 취한 여성 이미지를 담은 'World Wide Fat'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작가는 대중 매체에서 선택한 이미지를 포마이카나 알루미늄 판과 같은 차가운 재질의 산업용 재료 위에 에나멜을 사용해 균일한 두께의 선으로 단순화시킨다. 재맥락화 (recontextualization) 혹은 탈맥락화 (decontextualizaion) 과정을 거친 이미지는, 일종의 기표로서 작용할 뿐, 욕망을 자극하기 위한 실제 쓰임이나 선정성 및 폭력성 같은 본래 의미를 상실한다. 하지만 좀 더 중요한 점은 이 선들이 새롭게 구축해내는 알레고리적 속성이다. 몇 가닥의 윤곽선으로 단순화된 이미지는 우리가 보길 원하고 소유하길 욕망하는 시각 이미지의 원형처럼 제시된다. 무정한 듯 몇 개의 간략한 선으로 추상화된 형태는 오히려 우리가 끊임없이 원본의 이미지에 집착하도록 한다. 원(原)이미지의 흔적(index)처럼 여기저기 생략되고 끊겨 완전하게 이어지지 못한 선들은, 우리의 머릿속에 본래 이미지의 원형을 복원시키게 만드는 이중의 수사학적 전략을 구사한다. 먼저 작가가 일종의 도상(icon)처럼 원형화한 이미지는 다시 그 원본의 모습을 재추출하도록 관객을 자극한다. 이때 성적 대상으로 우상화된 여성의 신체에서 이목구비는 제거되어 전형화된 미인의 외모를 지칭하지 않으면서도, 페티시즘을 과장하듯 특정 신체 부위의 선들은 좀 더 복잡하게 강조된다. 하지만 이 선들은 마치 스스로 욕망하는 시각 이미지가 태생적으로 갖는 불안과 공포와 상실감에 대한 상징물(物)과 같다. 노란, 연두, 은색, 검정색의 딱딱한 포마이카에 에나멜로 칠해진 단순한 선들은 멀리서 보면 판화처럼 배경에 단단히 새겨진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특유의 부드러운 물성이 강조됐으며 얕은 층을 이뤄 포마이카에 살짝 얹혀 있어서 쉽게 긁히거나 금방이라도 중력 때문에 흘러내릴 것만 같다.
  우리가 어떻게 대중 매체에 자극을 받으며, 어떻게 이미지-스크린으로 그 자극을 내면화하는지에 대해, 작가는 인지심리학적 자세를 취한다. 작가는 앞선 개인전의 제목으로 ‘아이코닉 메모리(Iconic memory: 자극이 사라진 후에 남는 시각적 인상)’라는 심리학 용어를 사용했다. 또한 공개된 작가노트에서는 일정 자극에 따른 스트레스 반응 변화의 과학적 연구 결과나, 우리가 보는 시각 이미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실제 개념과 상충할 때 발생하는 의미에 대해 언급하였다. 예를 들면, 전작인 'Two Heads'는 착시와 언어유희를 결합시켜 언어적 이미지로 만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간략하게 그려진 선의 끝을 따라 큰 원을 돌면 인간의 머리가 그려지고 그 안에 사람의 이목구비처럼 각각 양머리와 여우머리가 그려져 있는데, 여기에서 제목의 ‘머리’란 단어는 ‘인간의 머리’와 그 안에 그려진 ‘동물의 머리’ 이렇게 두 개의 의미로 충돌한다. 한편 '풍선' 시리즈에서는 개, 소녀, 모기, 헬기, 사슴 등 이미지의 계열을 쉽게 분류할 수 없는 소재를 실루엣으로만 단순화시키고 선후 관계를 알 수 없게 묘한 형태로 중첩시켰다.
  애초에 본 전시의 제목으로 선택했던 단어는 자신이 말한 거짓말을 스스로 사실이라 믿는 허언증 (虛言症)이란 정신병을 뜻하는, 'Mythomania' 였다. 이는 이다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미지가 분명히 원본이 있음에도, 원본이 없는 이미지로서 선명한 윤곽선을 통해 그 이미지의 원형처럼 제시된다는 점, 또한 이때 이미지는 단순한 차용이 아니라 모의된 것, 즉 오리지널이 있으면서 또한 없는 복제된 이미지라는 점에서 적절히 부합한다. 일종의 ‘가공된 이미지(simulated image)’라 할 수 있는 이다의 작업은 다양한 대중 매체 이미지를 통해 끝없이 갱신되고 재구성되면서 더욱 단단해지는 우리의 욕망을 (재)생산하는 기계처럼 ‘유사-도상(Pseudo-icon)’적 계보학을 구축한다.■



   얼핏 색 잘 쓰고 깔끔한 마감으로 단장한 예쁜 그림들로 넘쳐나는 화단이고 보면, 이다(RheeDa)가 내놓은 의사(擬似) 아이콘(Pseudo-icon) 연작은 화단 트렌드의 연장선 어디에서 튕겨 나온 부산물 중 하나로 이해해도 무리는 없으리라. 무릇 2도로 제한된 경제적 색채 고집, 앙증맞고 간결한 구성, 약간의 번들거림을 동반한 럭셔리한 면 재질감, 거기에 깔끔하게 마감된 전체 인상을 감안할 때 그렇다. 그렇지만 동시대 청년작가와의 외형적 동형성 너머로 그가 2000년대 초반부터 줄곧 제시해온 주제는 작품 개별들로부터 그럴듯한 스토리를 유추하기는 어려우나, 개별 작업이 누적돼 하나의 연쇄를 이루면서 선명한 수렴점을 만든다. 그것은 도발 직전의 폭력과 사회적 합의에 영원히 이르지 못할 (그렇지만 영원히 탐닉될 역설을 갖는) BDSM적 색욕이다. 2002년 내놓은 은 모종의 사고로 바닥에 널 부러진 인물을 제시한다. 머리에서 한 가마니를 쏟아낸 피는 캔버스 말단까지 흘러내리며 화면을 적신다. 이 짧은 해설로 우리는 혈흔낭자의 익숙한 사고 장면을 떠올릴 법하지만, 실제 작품은 밝은 보랏빛 면과 그 위로 얹힌 굵은 연분홍색 라인 수십 가닥으로 구성된 다분히 장식적인 페인팅 한 점이다. 이 끔찍한 대형사고의 전후로 발생했을 인과적 서사는 단조로운 구성 속에 묻히거나 반짝이는 표면에 밀려 증발하여 자취도 없다. 전자가 물리적 폭력의 결과를 창백하게 약호화 시켰다면, 동일한 시기에 제작된 는 앞의 작품과 비슷한 이치로, 공동체가 윤리적 금기로 임의 합의한 색욕의 한 유형을 팬시 상품처럼 재현했다. 한 연구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약 8할은 결박과 성적 자극 사이의 연관성에 동의한다고 한다. 이 작품은 입 주위를 결박 당한 젊은 여성을 재현하고는 있으나, 결과적으로 제시되는 것은 포마이카 위로 요철효과를 내며 얇게 올린 에나멜의 앙증맞은 색 두께다. 이렇듯 ‘쎈’ 주제만 선별하는 이다의 편향이 간결한 아이콘 속에 ‘결박’되면서 윤리적 강도 역시 제어되고 중화된다. 이로서 사회적 금기로 지목된 저속한 장면들은 귀여운 자태로 재가공 되어 우리 앞에 선다. 그 과정은 무릇 비정하고 기계적이다. 의 선혈로 물들여져야 할 아스팔트는 그저 피의 윤곽선만 잡아주는 것으로 족했으며, 탄탄한 결박이 동반한 여성의 간절한 표정의 일그러짐도 2도 색조의 실크스크린 마냥 대충의 전모만 전달하는 것으로 제한되었다. 그 결과는? 온갖 종류의 파렴치한 금기들이 (작가 입장에서) 윤리적 부담에서 자유롭게 태연자약 재현되고, (관객 입장에서) 단지 하나의 감상 대상으로 간주되는, 그럴듯한 알리바이가 성립되었다.
  금기된 내용을 합의된 형식 속에 가둬온 이다의 전략은, 무정형적 색욕(色慾)의 덩어리를 정형화된 색과 욕으로 구별시키는 효과를 동반한다. 얼핏 게리 흄(Gary Hume)의 일러스트적 작업을 연상시키는 이다의 딱 떨어지는 에나멜 그림은 2006년 신작에서도 이어진다. 금번에도 중력의 저항을 받지 않는(!) 탄탄한 가슴 한쪽을 드러낸 당찬 소녀 < 18 세 >와 연전에도 제작된 을 동일한 전략으로 택했다. 이번에는 작지만 눈 여겨 볼 신작이 있다. 연작과 < 양머리 >, < 여우머리 >다. 뒤의 것은 사람의 안면부에 포유류의 두상을 포개놓은 것으로, 작가의 중의적 양해 구하기가 변형되어 나타난 경우로 보인다. 앞의 것은 군수품과 동물의 실루엣을 겹쳐 제시하는데, 일면 뒤집힌 전함을 한 손으로 떠받든 소녀와 전함의 위로 덤덤히 올라선 달마시안과 군용헬기의 조합을 보여준다. 전함, 소녀, 달마시안, 군용헬기 중 전함과 헬기를 제하면 문맥의 공통분모를 찾기 어려운 구성인자들이다. 물리력의 대변자인 군수품과 문맥적으로 정반대를 의미하는 동물과 유아의 실루엣이 상호 겹쳐지면서 개체가 갖고 있는 본질(가령 군수품의 폭력성)은 휘발되고 만다. 이것은 방법적으로 2002년 이후 줄곧 채택된 중의적 재현술이다.
  끝으로 그간 이다가 작품 속에 불러들인 이미지 원본 출처에 대한 언급할까 한다. “작업의 소재들을 신문이나 잡지, 광고, 인터넷 등의 대중적 매체에서 찾는 (작가노트 中)” 데 이렇듯 저작권이 사실상 무시된 이미지들은 작가가 전달하려는 욕망의 단순 반복성과 호흡을 같이 한다. 미디어가 폭로하는 무차별적 폭력과 색욕의 천태만상은 엄밀히 말해 현대인의 뇌리 속에 떠있는 무형의 아이콘을 클릭해서 도출된 결과이다. 이다의 작업은 그 아이콘을 머리 밖으로 빼낸 결과물이다. 바로 그것이 이 약호화된 섹스어필과 잔학무도의 씨너리(scenery)가 우리에게 친숙한 이유일 것이다 ■ 

 욕망 재현의 
중의적 알리바이 
: 색(色)은 색이요, 
욕(慾)은 욕이다

 
반이정 (미술평론)
< ICONIC MEMORY > 전시비평, (유아트스페이스, 2006)